에너지 다소비 업종 대기업 A사는 내년 공장 신·증설 등 투자 계획을 수립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온실가스 로드맵이 정해지지 않은 탓이다. A사는 신·증설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늘렸다가 뒤늦게 수백억원에 이르는 '세금(배출권 구매)' 폭탄을 맞을까 하는 우려가 크다.

A사 관계자는 “정부 온실가스 정책 발표 지연으로 인한 불확실성 때문에 기업은 사업 계획 수립이 곤란한 상황”이라면서 “정부 발표만 기다리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에너지다소비사업장 중 하나인 포스코 포항제철소.
에너지다소비사업장 중 하나인 포스코 포항제철소.

문재인 정부가 '환경'을 성장의 새로운 가치로 강조하지만 늑장 정책으로 기업 발목을 잡고 있다.

25일 기획재정부와 환경부 등 관계 부처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들어 배출권거래제 2차 계획기간(2018~2020년) 할당 계획, 2030 온실가스 감축 로드맵 등 기업 경영 활동과 밀접한 환경 정책 결정이 줄줄이 지연됐다.

상반기에 마무리 됐어야 할 배출권거래제 2차 계획 기간 할당 계획은 연말인 12월께나 확정될 것으로 보인다.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로드맵은 연말에 확정 예정이었지만 이르면 내년 6월, 늦으면 내년 말까지 지연될 것으로 전망된다.

기업은 '패닉' 상태다. 당장 내년에 온실가스를 얼마나 배출해도 되는지 모르고, 2030년까지의 장기 배출량도 어떻게 바뀔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기업에 가장 큰 위협 요소인 불확실성을 정부가 키우는 형국이다.

온실가스 정책이 늦어지는 이유는 기획재정부 소관이던 업무를 환경부로 이관하는 작업이 더디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국정 과제 발표에서 온실가스 업무를 환경부로 이관하겠다고 발표하자 해당 업무를 수행하던 기재부가 사실상 손을 뗐다.

업무 이관 행정 절차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법, 정부조직법 등 3개 법 시행령을 모두 개정해야 한다. 환경부에 따르면 현재 녹색성장기본법과 배출권거래제법 시행령 개정은 마무리 단계로, 법제처 심사를 밟고 있다. 정부조직법 시행령 개정은 행정안전부에서 처리가 늦어지고 있다.

환경부는 이르면 다음 달에나 업무를 이관 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아무리 서둘러도 배출권거래제 2차 계획 기간 할당 계획 발표는 12월께나 가능하다. 올해를 넘길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기업 경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정부의 늑장 대응에 정유, 화학, 시멘트, 철강 등 에너지 다소비 업종은 곤혹스럽다. 환경부가 온실가스 정책을 담당하면 감축 부담이 이전보다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계획 발표까지 늦어졌다. 기업 경영에 혼란이 가중됐다.

자동차업계도 당장 내년 온실가스 감축 계획이나 에너지절약설비 설치, 배출권 구매계획 등 수립에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자업계 역시 에너지절약시설 투자 계획 수립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잦은 소관 부처 변동으로 일관성 있는 온실가스 감축 사업 수행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것이다.

석유화학은 대표적인 에너지다소비업종이다. 사진은 롯데정밀화학 울산공장.
석유화학은 대표적인 에너지다소비업종이다. 사진은 롯데정밀화학 울산공장.

산업계에서 원성이 나오자 환경부는 조만간 기재부·산업부 등과 함께 관계 부처 합동 '기후변화전략태스크포스(가칭)'를 꾸릴 계획이다. 업무 이관 이전에 온실가스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TF를 통해 배출권거래제 2차 계획 기간 할당 계획을 협의한다. 환경부는 계획 확정 이전에라도 산업체에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설명했다.

이미 일정이 늦어진 데다 최종안이 아닌 중간 정보 제공으로 온실가스 정책의 불확실성을 해소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산업계 관계자는 “환경부가 다시 온실가스 정책을 주관하면 감축 강도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면서 “온실가스 배출 부담 때문에 신·증설 계획과 노후설비 스크랩(폐기)을 병행하거나 해외에 공장을 세워야 하는 상황은 오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함봉균 산업정책부(세종) 기자 hbkone@greendaily.co.kr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국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2015년부터 시행된 제도다. 기업은 정부로부터 배출권을 할당받아 할당된 배출권 범위 안에서 온실가스를 배출하거나 시장에서 배출권을 추가로 구입, 초과 배출량을 정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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